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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한국의 명 수필문[ 백설부]2018-05-05 14: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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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 조차 어리석은 일이나, 도회인[都會人]으로서 비를 싫어하는 사람은 많을지 몰라도, 눈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눈을 즐겨하는 것은 다만 개와 어린이들 뿐만이 아닐 것이요, 겨울에 내리면 온 세상이 일제[一齊]히 고요한 환호성[歡呼聲]을 소리 높여 지르는 듯한 느낌이 난다. 눈 오는 날에 나는 일찌기,무기력[無氣力]하고 우울[憂鬱]한 통행인[通行人]을 거리에

서 보지 못 하였으니 부드러운 설편[雪片]이, 생활에 지친 우리의 굳은 얼굴을 어루만지고 간질일 때, 우리는 어찌된 연유[緣由]인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온화[穩和] 하게된 마음과 인간다운 색채[色彩]를 띤 눈을 가지고 이웃사람들에게 경쾌[輕快]한 목례[目禮]를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나는 겨울을 사랑한다. 겨울의 모진 바람 속에 태고[太古]의 음향[音響]을 찾아 듣기를

나는 좋아하는 자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어라 해도 겨울이 겨울다운 서정시[抒情詩]는 백설[白雪], 이것이 정숙[靜肅]히 읊조리는 것이니, 겨울이 익어가면 최초[最初]의 강설[降雪]에 의해서, 멀고먼 동경[憧憬]의 나라는 비로소 도회[都會]에 까지 고요히 들어 오는 것인데, 눈이 와서 도회가 잠시 문명[文明]의 구각[舊殼]을 벗고 현란[絢爛]한 백의[白衣]를 갈아 입을 때 눈과 같이

온, 이 넓고 힘세고 성스러운 나라 때문에 도회는 문득 얼마나 조용해 지고 자그마해 지고 정숙[靜肅]해 지는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이때 집이란 집은 모두가 먼 꿈속에 포근히 안기고, 사람들 역시 희귀[稀貴]한 자연[自然]의 아들이 되어, 모든 것은 일시에 원시시대[原始時代]의 풍속[風俗]을 탈환[奪還]한 상태[狀態]를 나타낸다. 온 천하가 얼어 붙어서 찬 돌과 같이도 딱딱한 겨울날의

한 가운데, 대체 어디서 부터 이 한없이 부드럽고 깨끗한 영혼[靈魂]은 아무 소리도 없이 한들한들 춤추며 내려 오는 것인지 ! . 비가 겨울이 되면 얼어서 눈으로 화[化] 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만일에 이 삭연[索然]한 삼동[三冬]에 불행히도 백설을 가질 수 없다면, 우리의 적은 위안[慰安]은 더우기나 그 양[量]을 줄이고야 말 것이니, 가령 우리가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추위를

참고 내다보면 이것이 무어랴 ! . 백설애애한 세계가 눈 앞에 전개[展開]되어 있을 때 그때 우리가 마음에 느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 . 말할 수 없는 환희[歡喜] 속에 우리가 느끼는 감상[感想]은 물론 우리가 간밤에 고운 눈이 이같이 내려서 있는 것도 모르고 이 아름다운 밤을 헛되이 자 버렸다는 것에 대한 후회[後悔]의 정이요 그래서 가령 우리는 어젯밤에 잘적엔 인생의 무의미[無意

味]에 대해서 최후[最後]의 단안[斷案]을 내린 바 있었다 하더라도 적설[積雪]을 바라보는 이순간[瞬間]에 만은 생[生]의 고요한 유열[愉悅]과 가슴의 가벼운 경음악[輕音樂]을 아울러 맛 볼지니 소리 없이 곧 가버리지 않고 마치 그 것은 하늘이 내려 주신 선물인 거나 같이 순결[純潔]하고 반가운 모양으로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또 순화[純化]시켜 주기 위해서, 아직도 얼마 동안은

남아 있어 준다는 것은, 흡사[恰似] 우리의 친우[親友]가 우리를 가만히 몰래 습격[襲擊]함 으로 써 , 우리의 경탄[驚歎]과 우리의 열락[悅樂]을 한층 고조[高調]하려는 그 것과도 같다고나 할는지 ! . 우리의 온 밤을 행복[幸福]스럽게 만들어 주기는 하나, 아침이면 흔적[痕跡]도 없이 사라지는 달콤한 꿈과 같이 그렇게 민속[敏速]하다 고는 할 수 없어도, 한번 내린 눈은 그러나 그다지 오

랫동안 남아 있어 주지는 않는다. 이 지상[地上]의 모든 아름다운 것은 슬픈 일이나 얼마나 단명[短命]하며 또 얼마나 없어지기 쉬운가 ! . 그것은 말 하자면 기적[奇跡]같이 와서는 행복[幸福]같이 달아나 버리는 것이다. 백설[白雪]이 경쾌[輕快]한 윤무[輪舞]를 가지고 공중[空中]에서 편편히 지상에 내려올 때 이 순치[馴致]할 수 없는 고공무용[高空舞踊]이 원거리[遠距離]에 뻗친 과감

[果敢]한 분란[紛亂]은 이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의 처연[淒然]한 심사[心思]를 가지게 까지 하는데 대체 이 흰 생명[生命]들은 이렇게 수많이 모여선 어디로 가려는 것인고 ? . 이는 자유[自由]의 도취[陶醉]속에 부유[浮遊]함을 말 함인가 ? 혹은, 그 는 우리의 참여[參與]하기 어려운 열락[悅樂]에 탐닉[耽溺]하고 있음을 말 함인가 ? 백설이여 ! 잠시 묻노니 너 는 지상의 누가 유혹[誘

惑]했기에 이곳에 내려오는 것이며 그리고 또 너는 공중에서 무질서[無秩序]의 쾌락[快樂]을 배운 뒤에 이곳에 와서 무엇을 시작하려는 것이냐 ? 천국[天國]의 아들이요 경쾌[輕快]한 족속[族屬]이요 바람의 희생자[犧牲者]인 백설이여 !   너희들은 우리들 사람 까지를 너희의 알 수 없으되 그리고 또 사실상 그 속에 혹은 기쁘게 혹은 할 수 없이 휩쓸려 들어가는 자 도 많이 있으리라 마는

그러나 사람이 과연 그런 혼돈[渾沌]한 와중[渦中]에서 능히 견딜 수 있으리라고 너희는 생각 하느냐 ? . 백설의 이와 같은 난무[亂舞]는 물론 언제까지나 계속[繼續]되는 것은 아니다. 일단 강설[降雪]의 상태[狀態]가 정지[停止]되면 눈은 지상[地上]에 쌓여 실로 놀랄만한 통일체[統一體]를 현출[顯出]시키는 것 이니 이와 같은 완전[完全]한 질서[秩序], 이와 같은 화려[華麗]한 장식

[裝飾]을, 우리는 백설이 아니면 어디서 또 다시 발견[發見]할 수 있을 까 ? . 그래서 그 주위[周圍]에는 또 한 하나의 신성[神聖]한 정밀[靜謐]이 진좌[鎭座]하여 그 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을 엿듣도록 명령[命令]하는 것이니 이때 모든 사람은 긴장[緊張]한 마음을 가지고 백설의 계시[啓示]에 깊이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보라 !   우리가 절망[絶望] 속에서 기다리고 동

경[憧憬]하던 계시[啓示]는 참으로 여기 우리 앞에 와서 있지 않은가 ?    어제 까지도 침울[沈鬱]한 암흑[暗黑] 속에 잠겨있던 모든 것이 이제는 백설의 은총[恩寵]에 의하여 문득 빛나고, 번쩍이는, 약동[躍動]하고, 웃음치기를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라 붙은 풀포기, 앙상한 나뭇가지들 조차 풍만[豊滿]한 백화[白花]를 달고 있음은 물론이요, 헐벗은 전야[田野]는 성자[聖者]의 영지[

領地]가 되고, 공허[空虛]한 정원[庭園]은 아름다운 선물[善物]로 가득하다. 모든 것은 성화[聖化]되어 새롭고, 정결[淨潔]하고, 젊고 정숙[靜肅]한 가운데 소생[蘇生]되는데 , 그 질서, 그 정밀[靜謐]은 우리에게 안식[安息]을 주며, 영원[永遠]의 해조[海潮]에 대하여 말한다. 이때 우리의 회의[懷疑]는 사라지고, 우리의 두눈은 빛나며 우리의 가슴은 말할 수 없는 무엇을 느끼면서, 위에

서 온 축복[祝福]에 대해 오직 감사[感謝]와 찬탄[讚歎]을 노래 할 뿐이다. 눈은 이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을 덮어 주므로 말미암아, 하나같이 희게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 이지만, 특히 그 중에도 눈이 덮인 공원[公園], 눈 에 안긴 성사[城舍], 눈 밑에 누운 무너진 고적[古跡], 눈 속에 높이 선 동상[銅像] 등을 봄은 일단으로 더 흥취[興趣]의 깊은 것이 있으니, 그것은 모두가 우울[憂鬱]한 옛

시[詩]를 읽는 것과도 같이, 그 배후[背後]는 알 수 없는 신비[神秘]가 숨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눈 이 내리는 공원[公園]에는 아마도 늙을 줄을 모르는 흰 사슴들이 떼를 지어 뛰어 다닐지도 모르는 것이고, 저 성사[城舍] 안 심원[深園]에는 이상한 향기[香氣]를 가진 앨러배스터의 꽃이 한 송이 눈 속에 외로이 피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것이며, 저 동상[銅像]은 아마도 이 모든 비밀

[秘密]을 저 혼자 알게 되는 것을 안타까이 생각[生覺]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어라 해도 참 된 눈은 도회[都會]에 속한 물건은 아니다. 그 것은 산중[山中] 깊이 천인[千仞] 만장[萬長]의 계곡溪谷]에서 맹수[猛獸]를 잡는 자의 체험[體驗]할 물건이 아니면 아니된다. 생각하여 보라 !   이 세상에 있는 눈 으로서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니, 가령 열대[熱帶]의 뜨거운 태양

[太陽]이 내리쬐는 저 킬리만자로의 눈, 우랄과 알래스카의 고원[高原]에 보이는 적설[積雪], 또는 오자마자 순식간[瞬息間]에 없어져 버린다는 상부 이탈리아의 눈 등...... 이러한 여러가지 종류[種類]의 눈을 보지 않고는, 도저히 눈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불행히 우리의 눈에 대한 체험[體驗]은 그저 단순[單純]히 눈오는 밤에 서울 거리를 배회[徘徊]하는 정도

에 국한[局限] 되는 것이니, 생각하면 사실 나의 백설부[白雪賦]란 것도 근거[根據] 없고 싱겁기가 짝이 없다 할 밖에 없다 .




 

저자소개 : 김진섭[ 金晋燮 ], { 1903 ~ } , 수필가, 독문학자. 호는 청천 [ 廳川 ], 전남 목포 출생. 일본 호오세이[ 法政 ]대학 문학부 독문과 졸업. 6 , 25 사변중 청운동 자택에서 납북되어 현재 생사 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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