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문[譯文]
범속[凡俗]함을 벗어나면 문득 기이[奇異]함이니, 일부러 의도적으로 기이함을 숭상[崇尙]하는 자는 기이한 사람이 되지 않고 이상[異]한 사람이 된다. 오염]汚]과 섞이지 않으면 문득 맑음[淸]이니 , 속됨을 끊고서 맑음을 구하려는 자는 맑은 자가 되지 않고 격렬[激烈]한 자가 된다.
원문[原文]
能脫俗便是奇 作意尙奇者 不爲奇而爲異 능탈속변시기 작의상기자 불위기이위이
不合汚便是淸 絶俗求淸者 不爲淸而爲激 불합오변시청 절속구청자 절속청이위격
선해 [禪解]
조악[粗惡]한 생각과 잡다[雜多]한 세속에 물들지만 않으면 진리[眞理]는 깨닫기 쉽다. 한 스님이 조주[趙州]스님에게 물었다. " 조주의 돌다리 라는 이름을 들은 지는 오래 되었는데, 여기와서 보니 작은 나무다리 밖에 보이지 않는군요. " 조주스님이 말했다 "너는 나무다리만 보았을
뿐 돌다리는 보지 못했구나. " " 그렇다면 어떤 것이 조주의 돌다리 입니까 ? " 조주스님이 대답했다. " 이 다리는 당나귀도 지나가고 말도 지나 가느니라. " 보살[菩薩]이 자비심으로 인해 능동적[能動的]으로 육도를 윤회[輪廻]하면서 부지런히 교화[敎化]의 행을 하는 것이 조주의 `돌
다리` 이다. 즉 돌다리 자체는 당나귀와 말들에게 밟히지만 묵묵히 자비[慈悲]를 베풀고 있다.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대비천제[大悲闡提]가 바로 전형적[典型的]인 `돌다리`의 구현[具現]이다. 일천제는 불성[佛性]이 없는 것을 의미하는데, 소승[小乘]불교에서는 일천제는 결코 부처가
될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대승[大乘]불교에서 표방[標榜]하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보살[菩薩]정신은 일천제[一闡提]를 비롯한 일체 중생[衆生]을 구원[救援]하기 전에는 절대로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하기 때문에 이류[異類: 다른 종류의 생물] 속에라도 기꺼이 가서 불도를 행한
다 . 조주스님은 동일한 문제가 다시 제기[提起]되었을 때는 당나귀나 말로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답했다. " 건너와라, 건너와. " 제자에게 `스스로 돌다리를 건너오라`는 것은 역시 일천제를 비롯한 모든 중생에 대한 대자대비의 마음을 말하고 있다. 스스로 `돌다리`가 되어서 온갖 중생의
발판이 되어 주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선[禪] 수행자[修行者]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불교로 보는 채근담[菜根譚] 평상심의 경계. 홍자성, 장연 옮김 에서 발췌[拔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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