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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동요 오빠생각의 이면 이야기2019-01-20 14:5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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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생각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오빠 말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 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 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 집니다 . 




   동요 오빠생각의 이면[裏面] 이야기



나이가 들면서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간다는 퉁명스런 핀잔을 들을 때가 있듯이 감수성[感受性]이 더 예민[銳敏]해 지는 건지 어떠한 불유쾌한 소리를 들어도 귀가 순해진다는 60세를 훌쩍 넘긴, 글을 쓰고 있는 필자[筆者]도 동요[童謠] 오빠생각을 유튜브에서 찾아서 듣다보면 서정적[抒情



的]이면서도 심금[心琴]을 울리는 애절[哀切]한 내용의 가사[歌詞]에 가끔 눈시울을 적시게 된다.   나라를 빼앗긴 암울[暗鬱]했던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시절 이었던 1925년 당시 12세 나이에 불과했던 최순애 라는 소녀가 창작[創作]한 동시다. 그후 박태준 이라는 음악 습작생[習作生]



이 오빠생각의 동시내용에 감명[感銘]을 받아 2년후인 1927년 작곡[作曲]을 함으로서 오빠생각은 동요음악으로 재탄생[再誕生] 되었다.  오빠생각의 동요는 당시나 지금이나 그리움이 배여있는 서정시[抒情詩]로서 전혀 손색[遜色]이 없는 동요작품으로 오랫동안 평가[評價]받고 있다 .  동시



를 쓴 12세 소녀 최순애 에게는 당시 21세였던 친오빠 최영주가 있었는데 일본에서 유학[留學]생활을 하던 최영주는 관동[關東]대지진 이후 무차별적인 조선인[朝鮮人] 학살[虐殺]을 피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 최영주는 서울을 여러차례 다녀오곤 했는데 다녀올 때마다 어린 동생에



게 작은 선물을 사다주곤 했다. 그런데 결국 최영주는 끈질기게 감시[監視]하고 따라다니던 일본순사[巡査]를 피해 서울로 아주 떠나게 된다. 동생 최순애에게는 다음에 꼭 선물을 사가지고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떠나지만 최영주는 그 후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최영주는 어쩌면 



서울로 간게 아니라 이역만리[異域萬里]인 만주간도 벌판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던 선구자[先驅者]들과 합류하여 일본군과 싸우다 목숨을 잃은 것은 아닐까 ?.  사랑하는 여동생 과의 약속[約束]을 지키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한 최영주는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 . 이 일화[逸



話]는 한 때 일본제국주의에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겼던 우리 한민족의 애한[哀恨]이기도 하다.  이후 경상남도 양산[梁山]{ 경부고속도로 양산 톨게이트 지나 부산 구서방향 7~8 km 지점 언덕위 내송, 외송 마을 지역}에 살고있던 이원수라는 어린이가 1926년 고향의봄 이라는 동시를 창작



하여 1923년 3월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이 만든 순수 아동잡지인 "어린이"에 투고하여 입상하게 된다.   동류는 동류끼리 따른다는 말이 있었던가, 최순애의 동시 오빠생각을 읽은 어린 이원수는 서정어린 동시내용에 감동을 받아 최순애에게 편지를 보내게 된다. 그렇게 편지와 문학글을 



주고 받으며 10년의 인연[因緣]을 맺어오던 최순애와 이원수는 당시 이원수 집안의 빈한[貧寒]함에도 불구[不拘]하고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결혼을 하게된다.  오빠생각 동요로 유명해진 최순애는 결혼후 문학활동을 접고 2남 2녀를 키우는데 주력하게 된다. 그 여러해 동안 준비, 축적[蓄



積]되어 있던 시작품들은 안타깝게도 6,25 전쟁의 참화[慘禍]속에서 모두 불타 없어 지면서 그 후의 작품은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이선희 오빠생각 https://www.youtube.com/watch?v=p71UIABpP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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